
2007.07.01 통권 574 호 (p548 ~ 561)
유교 종주국 복귀 노리는 ‘동아시아 사상 제패’의 속내
요즘 중국에 관심이 있다는 사람치고 ‘대국굴기(大國푞起)’를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다. 중국 공산당 지도부의 집체학습 내용을 토대로 만들었다는 이 다큐멘터리는 지난해 11월 중순 관영 CCTV가 중국에서 방영해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 뒤 우리나라에서도 올 2월에 EBS가 방영했는데, 노무현 대통령을 비롯해 국내 최대 재벌의 임원진이 이 프로그램을 집단으로 ‘학습’했다고 해서 세간에 화제가 된 바 있다.
모두 12부작인 이 다큐멘터리는 15세기부터 지금까지 9개 강대국이 흥망을 거듭한 역사를 다룬다. 아홉 나라는 포르투갈, 스페인,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 독일, 일본, 러시아(소련), 미국이다. 그런데 각 나라의 성쇠를 다룬 1편에서 11편까지를 보면서 사실 필자는 특별한 감흥을 받지 못했다. 세계사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대개 알 만한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단지 중국의 다큐멘터리 제작수준이 꽤 높아졌다는 점, 그리고 중국도 이제 이런 내용을 공중파로 방송한다는 데 내심 놀랐을 뿐이다(이유는 뒤에서 설명하겠다).
마지막인 12편은 ‘대도행사(大道行思)’, 우리말로 하자면 ‘큰 길을 가는 생각’(EBS는 ‘21세기 대국의 길’로 번역했다)이라는 제목으로, 이전의 내용을 총괄하면서 대국이 되는 조건을 따져보고 있었다. 그런데 여기서 귀가 번쩍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각국 학자들이 내놓은 답이 서로 엇갈리지만, 모두 중요하다고 동의하는 것은 사상과 문화의 영향력과 정치체제·제도의 개혁이다.”
이것이 ‘대국굴기’가 찾은 대국의 제1조건이었다. ‘소프트 파워’의 중요성을 역설하는 미국 하버드대 조지프 나이 교수 인터뷰 화면이 자막과 함께 스쳐갔다. 경제의 중요성은 그 다음이라는 것이다. 사회발전이 사상과 문화의 혁신에 의해 인도돼야 하고, 그럴 때만 경제발전이 대국으로 가는 사회발전의 강력한 엔진이 된다는 것이 방송의 골자였다. 그 뒤에야 정치체제와 제도의 개혁, 국가의 리더십, 과학기술의 중요성 등이 차례로 강조된다.
이처럼 국가 지도부가 사상과 문화의 중요성을 통감하고 이를 국민에게 ‘학습’시키는 나라가 중국이다. 오래된 문화대국의 자신감이 이를 가능케 한다. 그들은 묻는다. 세계적으로 영향력 있는 사상과 문화를 꽃피웠으며, 앞으로도 꽃피울 수 있는 나라는 어디인가. 문화의 저력에 뿌리를 두고 인류의 미래를 이끌 수 있는 21세기 최강대국은 어느 나라인가. 직접 답하지 않지만 ‘대국굴기’는 이미 ‘중국’이라고 말하고 있다.
21세기 대국의 조건
어느 시대나 경제력은 중요했지만, 단지 돈만으로 시대의 흐름을 선도하는 대국이 탄생한 경우는 없었다. 시대가 요구하는 정신적 가치에 민감하고 새로운 창조적 흐름을 만들어내는 민족과 나라가 세계사의 주인공이 되었다. 경제적 성공은 그 뒤에 따라붙었다. 한번이라도 세계의 중심무대에 서본 나라들은 경험적으로나 역사적으로나 이를 잘 알고 있고, 그래서 사상과 문화를 존중한다.
중국은 지금 천하의 중심이던 옛 영화의 부활을 꿈꾸며 21세기 세계 초강대국을 향한 행보에 나섰다. 그들은 전통문화와 전통사상의 중요성을 재발견하고 있다. 중국은 자신들의 문화를 동양문화의 대표주자로 자리매김하기 위해 전통문화의 발굴이나 현대화 작업에 국가적 관심과 인력을 집중하고 있다.
이는 비단 중국만의 일이 아니다. 일본 역시 전통문화에서 국가발전의 새로운 목표와 동력을 찾고 있다. 국가와 주요 기업들이 연합해 일본 전통문화와 첨단기술을 결합하는 ‘네오 재패니스크(Neo Japanesque·신일본양식)’ 구축에 열을 올리는 중이다. 유럽에서도 문화가 대세다. 유럽연합(EU)은 각국의 고유한 문화 다양성을 미국에 대항하는 유럽의 최대장점으로 육성하고 있다. 이는 모두 미국 중심의 일극(一極) 세계체제 이후를 대비하는 정신적·제도적·학문적 준비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세계의 강국들이 모두 자국의 문화 전통에서 성장의 핵심동력을 찾는다. 그들의 가장 큰 자산은 자신들의 문화와 정신적 전통을 사랑하는 국민의 높은 문화의식과 자긍심이다. 물론 경제가치와 정치이념 역시 중요하지만, 이를 만들고 이끌어가는 주인공은 사람이다. 인간다운 삶이 무엇이고, 어떻게 해야 잘사는 것인지, 어떤 사회를 만들어야 하는지에 대한 근본적 성찰은 그 사회의 문화수준과 삶의 질을 결정하고 새로운 미래를 개척하는 원동력이 된다. 대국과 소국의 차이는 이런 성찰이 이뤄지는지 아닌지에 달렸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하여 대국은 다른 나라에 사상과 문화의 영향력을 발휘하지만, 소국은 다른 나라에서 사상과 문화를 공급받는다는 것이 역사의 가르침이다. 자본주의든 사회주의든, 아니면 신자유주의든 ‘제3의 길’이든,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게 아닌 이상 그 길을 개척하고 남보다 앞서 구현한 나라들이 있게 마련이다. 이렇게 보면 세상의 모든 나라를 크게 두 종류로 나눌 수도 있을 것이다. 세계적으로 영향력 있는 사상과 문화를 창조하는 국가와 그렇지 못한 국가다. 전자가 ‘대국’이고, 후자는 ‘소국’이다.
고조되는 국학(國學) 열풍
2007년 중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문화상품은 할리우드도 한류도 아닌 ‘국학(國學)’이다. 중국의 전통문화 열풍은 가히 진풍경이라 할 만하다. 베이징스판(北京師範)대학 신문방송학과의 위단(于丹) 교수가 지난해 11월 TV 강의교재로 출간한 ‘논어’ 해설서 ‘論語心得’이 석 달 만에 250만부(해적판 포함 400만부) 이상 팔리면서 중국 출판 역사의 새 장을 열었다. 3월에 발간한 ‘장자’ 해설서 ‘莊子心得’은 초판을 100만부나 찍기도 했다. 비단 위단만이 아니다. “전통문화 관련 서적은 베스트셀러가 되지 않은 것이 없다”는 말이 나돌 정도다. 대학은 물론 각급 기관에 개설된 전통 사상과 문화 관련 강좌마다 장사진을 이루고 있다. 이른바 ‘무착륙(no landing)’ 고공성장을 계속하는 중국 경제처럼, 최근 수년 동안 고조된 중국의 국학 열기도 식을 줄 모른다. 이런 현상을 대체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우선 중국인이 최근 지속된 경제성장으로부터 자신감을 얻으면서 100여 년 전 서구 열강의 침탈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진 민족의 자부심을 회복하려는 욕구가 바탕에 깔려 있을 것이다. 개혁개방과 경제개발 과정에서 영향력이 약화된 사회주의 이념의 빈자리를 대신할 원리를 전통에서 재발견하고 있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동아시아 전반에 여전히 남아 있는 민족주의 분위기도 빼놓을 수 없고, 서구 근대의 한계와 문제점에 대한 반성의 차원에서 전통으로의 회귀를 선택했다는 의견도 있다. 특히 대만, 홍콩과 미국의 화교 학자들을 주축으로 펼쳐진 문화보수주의 관점의 ‘현대신유학’, 그리고 ‘유교자본주의’와 ‘아시아적 가치’ 논쟁 등이 중국에 소개되면서 전통 사상과 문화에 대한 지식인과 대중의 관심이 고조된 점도 눈여겨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