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교 종주국 복귀 노리는 ‘동아시아 사상 제패’의 속내(2)
신동아  2007.07.01 통권 574 호 (p548 ~ 561)

‘중국 철학’의 출생


이런 지적, 문화적 요인 외에 좀더 현실적인 배경도 있다. 빈부격차와 부패확산 등 심각한 사회모순에 직면한 공산당이 시들어가는 인기를 만회하기 위해 민족감정을 고취한다는 것이 지배적인 관측이다. 무엇보다 후진타오(胡錦濤) 체제가 이른바 ‘화해사회(和解社會)’ 건설을 국가의 단기목표로 설정하고 그 이론의 자양분을 전통사상에서 공급받으려 하고 있다. 이를 위해 국학에 범국가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고, TV 등의 강력한 대중매체를 통해 국학 열풍을 확산시키며, 이를 애국주의 고취의 수단으로 활용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이런 여러 요인이 문화·사회·정치적으로 복잡하게 얽힌 결과물이 지금 중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국학 열풍이다.

중국인이 말하는 ‘국학’은 당연히 중국의 역사·문학·철학 등에 대한 연구를 가리킨다. 특히 ‘중국철학’이 그 핵심이다. 그렇지만 따지고 보면 근대 국민국가가 탄생하기 이전에는 ‘중국철학’이라는 개념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단지 유교, 불교, 도교 같은 사상 유파의 개념만 있었을 뿐이다. 국학도 마찬가지다. 예전에도 ‘국학’이라는 말은 있었지만 이는 ‘국가급 교육기관’, 즉 오늘날의 국립대학 정도를 가리켰다. 또는 ‘국가에서 장려하는 학문’을 의미하기도 했다. 자국의 고유한 사상이나 역사, 문화 등을 연구대상으로 삼는다는 현대적 의미의 ‘국학’은 국민국가의 출현 이후에 등장했다. 이처럼 중국철학이나 국학은 모두 근대 이후에 성립된 학문이다. 여기에 우리가 숙고해야 할 동아시아 근대의 모순과 역설이 담겨 있다.


우리가 흔히 쓰는 ‘동양철학’이라는 개념은 근대 일본의 발명품이다. 그것은 일본이 서양으로부터 ‘동양(Asia)’을 타자화하는 방법을 배운 뒤, 다시 스스로를 동양의 중심으로 자리매김하면서 만들어낸 이념적 장치의 하나였다. 일본을 맹주로 서양에 대적하는 동양의 공영체제를 구축해야 한다는 이른바 ‘대(大)아시아주의(Pan-Asianism)’ 이념을 구축하고 확산하는 과정에서 서양과 다른 동양의 정신 전통을 연구하는 학문으로 ‘동양철학’을 고안해낸 것이다.

중국인은 ‘동양철학’이라는 말 대신 ‘동방철학(東方哲學)’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동방’이라는 말이 사실상 ‘동양’과 같은 의미로 쓰이는 것은 맞다. 그러나 주목할 필요가 있는 것은 중국에서 말하는 ‘동방철학’이 우리가 생각하는 ‘동양철학’과 미묘한 뉘앙스의 차이를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오만과 편견


중국 베이징대 철학과에 ‘동방철학’을 연구하는 전공분야가 있다. 이를 소개하는 베이징대 웹사이트의 글은 “이 연구(동방철학)의 특징은 중국을 제외한 다른 중요한 동방 국가 또는 지역의 철학을 주요한 연구대상으로 하는 것”이라고 명시하고 있다. 더불어 “동방철학은 중국의 철학연구 가운데 비중이 높지 않고 이 연구에 종사하는 연구자도 적다. 하지만 그 내용은 매우 중요하다”고 친절하게 부언한다. 중국사회과학원 철학연구소 사이트의 소개에 따르면, 동방철학은 “인도철학, 아랍 이슬람철학 및 유교문화권에 속하는 일본 한국 베트남 등의 철학을 포괄한다.” 동방이 ‘서방’에 대응하는 포괄적 개념임은 분명한데, ‘동방철학’에는 ‘중국철학’이 제외돼 있다. 대체 무슨 연유일까.

중국에서 ‘동방철학’은 중국철학까지 포괄하는 큰 범주가 아니라, ‘중국철학’의 주변 내지는 하위에 위치한 ‘지역적 철학’ 또는 ‘아류 철학’이라는 의미로 사용된다. 중국인의 의식에서 ‘서양철학’에 대응하는 것은 곧 ‘중국철학’이며, ‘동방철학’은 중국철학에 대한 ‘변방철학’일 뿐이다. 그러므로 중국인은 중국과 서양의 철학이라는 문맥에서 ‘중서(中西)철학’이라고 하지, ‘동서양철학’이라 하지 않는다. 여기에는 ‘중화’와 ‘오랑캐’를 양분하고 중화를 그 중심에 두는 오래된 중화주의 세계관, 그리고 이른바 ‘동방’에서 중국문화의 세례를 받지 않은 국가 또는 지역이 없다는 문화적 자부심이 짙게 배어 있다.


중국인이 보기에는 유교와 도교는 물론 제자백가의 철학사상 모두가 중국철학이다. 심지어 동아시아의 불교조차 중국철학의 일부다. 불교가 인도에서 중국으로 들어와 ‘중국화’한 뒤에 다시 한국과 일본 등으로 전해졌기 때문이다. 한국이나 일본 일각에서 공자(孔子)와 주자(朱子)를 존숭하고 유교를 중시하는 것이 흐뭇하고 대견하기는 하지만, 유교는 근본적으로 ‘중국철학’이며 한국이나 일본에서 구현된 유교는 단지 그 아류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중국 지식인의 일반적인 생각이다. 동아시아 문명의 3대 골간으로 지목되는 유(儒) 불(佛) 도(道) 사상이 모두 중국에서 나와 ‘동방’의 변방지역으로 확산됐으므로, ‘중국철학’을 중심에 두고 그 하위에 나머지 ‘동방철학’을 두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긴다.


이처럼 중국인이 동아시아를 사유할 때, 그들은 아주 쉽게 중국이 동아시아의 맹주로 군림하던 지난날의 기억을 되살린다. 마치 한국인이 일본을 사유하며 아직기와 왕인을 떠올리거나 일본 천황가(天皇家)가 고대 한국의 후예임을 강조하듯이 말이다. 여기에는 상대 국가를 문화적, 정신적으로 동등하게 대접하지 않으려는 우월과 배타의 감정의 짙게 배어 있다. 그런데 서양에 대해서는 이런 정서가 발휘되지 않는다. 오히려 어깨를 나란히 하지 못해 안달이다.


이런 사유의 배후에는 서양에 대한 동경과 콤플렉스의 양가감정(兩價感情), 그리고 동아시아의 타자를 배제하고 지배하려는 욕망이 잠복해 있다. 서구로부터 격심한 충격을 받은 후 이에 반발해 자기 정체성을 찾는 과정에서 국가주의와 민족주의에 기울고, 이로부터 비롯된 ‘오만과 편견’에서 다시 아시아의 이웃들을 폄훼하고 차별한다. 서구 문화를 숭배와 심취의 대상으로 삼는 동시에 반발과 극복의 대상으로 삼고, 서구의 패권주의를 비난하면서도 서구 제국주의보다 더욱 ‘오만’한 자세로 국가와 민족 경계 밖의 아시아인들을 ‘타자화’하는 이율배반, 이런 중층의 모순과 역설이 동아시아 근대의 전개과정에서 흔히 발견된다.


앞에서 중국 관영 TV가 ‘대국굴기’를 방영한 데 필자가 내심 놀랐음을 언급한 바 있다. 이 프로그램은 서구 열강의 자본주의 발전을 긍정하고, 식민지 지배와 경제 수탈을 대국의 경쟁력으로 부각한다. 비록 제국주의의 폐해를 지적하지만 그 비중은 미미하다. 대신 부(富)를 향한 욕망을 사회발전의 원동력으로 인정하고 자유와 경쟁, 민권의 확대 등을 높이 평가한다. 중국이 아무리 무늬만 사회주의인 나라라고 하지만 어쨌든 자본주의와 제국주의를 반대해온 사회주의 중국에서 자본주의 정신과 역사를 이렇게 거리낌 없이 ‘학습’한다는 게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런 현상과 관련해 흔히 중국의 실용주의가 거론된다. 특히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잡으면 된다”는 덩샤오핑(鄧小平)의 이른바 ‘흑묘백묘론(黑猫白猫論)’이 유명하다. 그러나 덩샤오핑 이전부터 중국의 역사 자체가 실용주의의 거대한 실험무대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중국철학은 그 태동의 순간부터 현실 문제에서 눈을 돌린 적이 거의 없다. 고대 제자백가의 관심사도 춘추전국의 혼란을 극복하는 데 있었지, 추상적인 진리나 이념 자체가 철학의 목적이 되지 않았다.


아침엔 절, 저녁엔 교회에


중국은 현실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된다면 어떤 이념과 지식 종교도 받아들이되, 대신 받아들인 것을 철저하게 중국화해왔다. 그리하여 불교를 중국화했고, 공산주의를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 마오쩌둥(毛澤東)은 마르크스와 레닌의 사상을 중국 현실에 맞게 창조적으로 계승발전시켜 이른바 ‘마오쩌둥 사상(Maoism)’의 독자적 이론과 실천 영역을 구축했다. 하지만 그것이 현실에 맞지 않게 되자 중국은 바로 실사구시(實事求是)를 앞세운 덩샤오핑 이론으로 선회했고, 이제는 자본주의를 자기 것으로 만들고 있다.


많은 한국인이 중국의 이런 문화 변동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단일한 이념이나 종교, 혈통, 생활방식 등에 집착하는 순결주의 성향이 한국과 한국문화에 강하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한국인은 차이와 다양성을 존중하는 데 취약하고, 중국인에 비해 현실 감각이 떨어진다. 또한 오늘날 한국 사회는 서구의 사상과 지식 종교를 사대적으로 추수하면서, 이를 자기 현실에 맞게 변용하고 새롭게 창조하는 데도 익숙하지 못하다. 이런 문화 토대에서 보니 마오쩌둥 사상 위에 덩샤오핑 이론을 올리고 거기에 다시 자본주의 시장원리를 접합시키는 식의 중국식 사고방식과 시도를 납득하지 못한다.


그러나 사상과 지식의 변용과 융합, 그리고 새로운 창조는 중국인에게 전혀 낯선 일이 아니다. 현실에 도움이 된다면 아침에 절에 갔다가 오후에 도관(道觀·도교사원)에서 참배하고 저녁에는 교회당에서 기도하는 것에서 어떤 모순도 느끼지 않는 사람들이 중국인이다. 중국인은 언제나 현실을 중심에 두고, 어떤 선택이 중국을 위대하게 할 것인지를 추구한다. 이런 면에서 중국은 예로부터 국가 실용주의를 견지해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비록 교조적 이념이 잠시 성행한 시기도 있었지만, 중국은 내부적으로 다양한 생각과 생활방식의 공존을 허용하는 관용의 전통을 지녔다. 그러나 여기에 하나의 전제가 있으니 ‘중화(中華)’ 자체의 정체성을 위협하거나 침해하는 요인은 철저하게 배격하고 평가절하한다는 점이다. 만일 그것을 거부할 수 없다면 받아들이더라도 완전히 중국적인 것으로 변용해버리고 만다.


차이와 다양성을 포용하고 받아들이는 관용과 실용주의 정신. 그리고 중화와 오랑캐를 양분하는 배타적 중화주의. 양립할 수 없을 것처럼 보이는 두 종류의 정신적 가치가 중국인의 의식 안에서 이렇게 병존한다. 공자가 ‘논어’에서 말한 ‘화이부동(和而不同)’, 즉 차이와 다양성을 인정하되(不同) 중화의 공동체 질서에 부응한다(和)는 전통이 중국인의 정신과 문화에 깊게 뿌리내려 있다.


그러므로 중국과 중국인은 내부적으로 실용적이고도 관용적이되 외부에 대해서는 배타적이고 주체적이다. 중국의 이런 문화 체질이 21세기 인류의 미래에 어떤 영향을 끼치게 될지를 확실하게 단정하기는 어렵다. 분명한 것은, 운명적으로 중국과 국경을 맞대고 살아야 하는 한국이 중국의 이런 사상과 문화의 추이를 세심하게 지켜보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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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환 | 2007/07/01 11:17 | Nomad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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